새떼를 쓸다
김경주
찬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처럼 새 떼가
날아오른다
새 떼의 종아리에 능선이 걸려 있다
새 떼의 종아리에 찔레꽃이 피어 있다
새 떼가 내 몸을 통과할 때까지
구름은 살냄새를 흘린다
그것도 지나가는 새 떼의 일이라고 믿으니
구름이 내려와 골짜기의 물을 마신다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
<새 떼를 쓸다>는 『고래와 수증기』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시다. 음미할 부분이 많다. 화자는 '새 떼'가 날아오르는 풍경을 바라본다. 그런데 그 풍경은 종아리에 찬물을 붓는 장면과 겹쳐진다. 새 떼가 비상하는 형상과 찬물 붓는 소리가 겹쳐진 결과 새 떼의 종아리라는 신선한 은유가 탄생한다. 종아리는 신체 이미지이다. 시인은 단순한 풍경의 겹침 너머로 세계와 몸의 중첩을 의도하고 있다. 2연의 놀라운 이미지들은 시인이 풍경을 몸으로 감당하고 받아내는 경지를 그려낸다. 세계를 몸으로 받아낼 때 몸에는 꽃이 핀다. 3연은 겹침의 운동성을 표상한다. '새 떼가 내 몸을 통과할 때까지'의 변신하는 시간이 '구름'으로 하여금 '살냄새'를 흘리게 한다. 구름이 주체가 되어서 골짜기의 물을 마신다. 시인은 자연의 이미지들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한다. 자연의 이미지는 내 몸의 일부가 되고, 내 몸은 자연이 된다. 내가 '새 떼'가 될 때 내 신체의 고정적인 형상은 유동적으로 변모한다. 새 떼 이미지는 세계와 나의 경계를 지워나가는 지속적 변화를 표상한다. 현실 세계에 통용되는 합리적인 사고, 오성적 인식, 물질을 고정시켜 파악하는 이성의 작용에서 멀어진다. 세계의 실재는 파동과 리듬으로 이루어진 '지속'이다. 화자 자신이 새 떼가 되는 상상은 지속의 세계에 근접한다. 독자는 진부한 현실을 초월하고 생명의 신비 앞에서 경탄하게 되는 상상력으로 진입한다. 나의 정신은 새 떼와 함께 날아오른다. 흩어진다. 다시 모인다. 김경주의 시가 난해한 현대시 사이에서 유독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모든 상상력은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는 추락과 몰락으로 마무리된다. 시의 현대성이 여기에 있다. 통일된 형상에 죽음을 들여와 균열을 내는 기법. 그는 자연이 인간이나 사회의 바깥에 있는 초월적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마지막 시행이 없었다면 우리는 단순히 자연을 꿈꾸고 예찬하는 시를 얻었을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과 아름다운 꿈에 근접했던 새 떼는 먼지로 표상되는 허무와 죽음의 의미를 껴안는다. 새 떼가 되는 상상력은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해 있기를 거부하고 고통을 받아들인다. 타자의 윤리까지도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타자와 만나는 방식은 언제나 즐거움으로 충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와 동일하지 않은 존재와 조우할 때 체험하는 차이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그 차이만큼 타자는 우리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동일화할 때 폭력이 되고, 나를 타자화할 때 사랑이 된다. 추락과 몰락은 자기-변화를 암시한다. '쓸었다'는 서술어도 갱신,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신체의 고통이 놀라운 상상력과 만날 때 김경주의 시는 아름답다. 하얗게 부르튼 입술-설원-순록의 연상이 만들어낸 다음과 같은 시를 보라.
순록들 내 입술 위를 걸어간다
혀로 발아래 얼음을 핥으며 간다
얼음 밑에 거꾸로 떠오른
누군가의 희멀건 발바닥을 핥는다
순록은 내 입술을 뜯어 먹는다 차가운 나무뿌리를,
얼어 죽은 새끼 순록의 뿔에서 돋아난
푸른 잎사귀들을 뜯어 먹는다
수염고래 한 마리가
내 입술 위로 올라온 적도 있다
귀가 뜨거워지면 얼음이 녹아내리므로
순록은 가만히 퍼덕이는 고래를 핥았다
내 입술에 쌓인 나뭇잎 아래서 순록은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순록은 내 입술 위에 앉아
수평선이 혀에 얼어붙을 때까지
서러운 혼잣말을 한다
나는 눈들의 지느러미에서 태어났어요
나는 설국(雪國)으로 끌려가서 비관주의자들의
부드러운 암각(暗角)이 되기도 했어요
속눈썹을 얼음 위로
하나씩 떨어뜨리며
되돌아오는 길을 표시했지요
행렬 속에서 길을 잃고
얼음 위에 서서 잠들어버린 순록은,
봄이 되면 내 입술 위의 따뜻한 얼음이 된다
살얼음 아래로 녹아내려 내 입술이 된다
내 입술 위의 벼랑 끝에서
순록들은 아슬아슬하다
- <내 입술 위 순록들> 전문
순록을 입술 위에 올려 놓는 상상력은 독자의 머리를 번쩍 깨어나게 한다. 입술은 설원이 되고 대지가 되며, 빙하 있는 바다가 된다. 그런데 시의 상상 놀이는 무(無)와 소멸을 가리키고 있다. '얼어 죽은 새끼 순록', '얼음이 녹아내리므로',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서러운 혼잣말', '부드러운 암각', '떨어뜨리며', ' 살얼음 아래로 녹아내려', '아슬아슬하다'와 같이 부재와 위태로움과 슬픔을 환기시킨다. 놀라운 상상력이 생경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인이 본인의 감각을 매우 민감하게 수용하고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즉, 시인은 자신의 몸에 충실하다. 김수영이 말하는 '온몸으로 쓰는 시'에 가까운 것이다. 몸으로 쓰기에 독자도 공명할 수 있다. 우리는 시인의 상상 세계 속에서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자기 망각의 체험, 그 아득한 몰아의 경지를 느끼는 동시에 부재와 무, 죽음의 영역에 다가간다.
다음 시에는 시인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것 같다. 시집의 소제목 중 하나이고, 이 제목을 부제로 한 연작시들이 시집에 여럿이다. 앞에서 언급한 시적 특질이 이 시에도 듬뿍 묻어난다. '무대 위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입김이다' 이 문장이 잊히지 않는다. 좋은 문장은 저절로 뇌리에 각인된다. 시집을 읽으며 처음으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꿈꿨다. 나의 언어도 시인처럼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다.
무대 위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입김이다
그는 모든 장소에 흘러 다닌다
그는 어떤 배역 속에서건 자주 사라진다
일찍이 그것을 예감했지만
한 발이 없는 고양이의 비밀처럼
그는 어디로 나와
어디로 사라지는지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다
입김은 수없이 태어나지만
무대에 한 번도 나타나서는 안 된다
매일 그는 자신이 지은 입김 속에서 증발한다
종일 그는 자신의 입김을 가지고
놀이터를 짓는 사람이다
입김만으로 행렬을 만들고자
그는 일생을 다 낭비한다
한 발을 숨기고 웃는 고양이처럼
남몰래 출생해버릴래
입김을 찾기 위해
가끔 사이렌이 곳곳에 울린다
입김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는 않을 것이라며
무리 속에서 헤매다가
아무로 모르게 실종되곤 했다
사람들은 생몰을 지우면
쉽게 평등해진다고 믿는다
입김은 문장을 짓고
그곳을 조용히 흘러나왔다
- <시인의 피> 전문
Let me in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너라는 이름이야
너를 처음 보았을 때
하얀 눈 위에
넌 잠들어 있었지
네 곁에 나는 가만히 누웠어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난 잠옷을 입고
널 따라갔어
네 잠옷 속에 들어가 웅크렸지
무서워도 난 소리 내지 않고
사랑해
무서워서 난 소리 내지 않고
사랑해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네가 불러준 이름이야
설맹(雪盲)
신문이 끊기자
나는 새들에게 싸였다
수도가 끊기자
나는 계곡을 내려오는
물이 되었다
사람이 끊기자
나는 대기권이 되었다
아침에 너는 내 몸에서
단어를 찾고
나는 너에게서 수증기를 찾는다
곡기를 끊은 돌멩이
햇빛 속에서 투명해진다
바람이 끊기자
하늘이 산을 오른다
김경주(1976년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창작협동과정에 대본및작사 전공으로 예술전문사를 취득했다. 2009년 제3회 「시작문학상」, 제17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제28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를 맡았다.
약력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꽃 피는 공중전화〉 외 5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9년 제3회 「시작문학상」, 제17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제28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불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태엽>으로 당선되어 극작가로 등단했다.
수상
- 2009년 제3회 「시작문학상」
- 2009년 제17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 2009년 제28회 「김수영문학상」
저서
시집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개정판 문학과지성사, 2012)
- 《기담》(문학과지성사, 2008)
- 《시차의 눈을 달랜다》(민음사, 2009)
- 《고래와 수증기》(문학과지성사, 2014)
산문집
- 《틈만나면 살고싶다》(한겨레출판, 2017): 공저(그림 신준익)
- 《패스포트》(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 《레인보우 동경》(넥서스BOOKS, 2008) : 공저
- 《펄프 키드》(뜨인돌, 2008)
- 《밀어》(문학동네, 2012)
- 《자고 있어, 곁이니까》 (난다, 2013)
- 《펄프 극장》(글항아리, 2013)
- 《블랙박스》(안그라픽스, 2015)
- 《16시》(안그라픽스, 2015)
- 《나무 위의 고래》 (허밍버드, 2015)
시극집
-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난다, 2014)
-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열림원, 2015)
- 《나비잠》(호미, 2016)
기타
역서
- 《안녕을 말할 때》(조화로운삶, 2008)
- 《분홍주의보》(써네스트, 2010)
-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한빛비즈, 2012)
- 《어린왕자》(허밍버드, 2013)
- 《존 레논 레터스》(북폴리오, 2014)
- 《아마도 그건 아물 거야》(아카넷주니어, 2014)
- 《CYCLE CHIC 사이클 시크》(북노마드, 2014)
- 《골리앗》(이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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