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사물이 이루는 교감, 그 충만한 기쁨
정현종은 사물과의 합일을 꿈꾸는 시인이다. 때문에 그의 시세계에서는 자아와 사물과의 교감이 충만한 기쁨 속에 재현된다. 사물과의 에로스적 합주(合奏)를 통해 빚어내는 축제의 교향곡이 정현종 시의 주조음을 이루는 것이다. "한가함과 한몸/천둥과 한몸/비와 한몸/뻐꾸기 소리와 한몸으로/나도 우주에 넘치이느니."('여름날')에서 보여지듯 세상의 모든 것과 한 몸을 이루려는 시인의 욕망은 결코 대상을 가리는 법이 없다. 또한 억압적인 사물의 질서에 숨통을 열고 생기를 불어넣는 그의 시혼은 "부서진 내 살결과 바람결이 같아지고/살결과 물결이 和答하"(죽음과 살의 和姦)기를 간절히 바란다.
말 그대로 그의 시는 사물과 '화간(和姦)'함으로써 사물의 속살 속으로 시적 상상력의 촉수를 내뻗고 애무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육감'을 가진 시인이다. 인간의 오관(五官)을 초월하는 '식스 센스'의 소유자인 셈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가리지 않고 교접하여 질퍽하게 몸을 섞는 정현종 특유의 사랑법이 바로 그의 시적 육감의 실체이다. 바로 이 시적 '육감(六感/肉感)'을 통해 그는 삶의 무거움을 털어 버리고 자유롭게 대상 속으로 스며들어 사물과 쩌릿한 합일을 이룬다. 그리고 시인은 바로 그 순간의 '생의 희열'을 예찬한다.
일찍이 김현이 '바람의 현상학'이란 글에서 포착한 것처럼, 시인은 시적 자아를 무한 확장 ·팽창시켜 '바람'처럼 세상의 구석구석에 두루 번지기를, 퍼지기를 갈망한다. "퍼지고 퍼져/무한 허공과 솔기 없이 이어"('달맞이꽃')지기를, "생명의 저 맹목성을 적시며/한없이 퍼져나"('무슨 슬픔이')가기를 강렬하게 희원하는 것이다. 이렇듯 나와 사물, 나와 세계 사이의 모든 경계가 가뭇없이 사라진 곳에는 "바깥은 가이없고/안도 가이없다/안팎이 같이 움직이며/넓어지고 깊어"('몸이 움직인다')지는 신묘한 시공간이 탄생한다.
가두리가 없는 번짐의 미학,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는 황홀한 친화력, 이 가공할 언어의 전염성! 그래서 그의 시의 언어들은 정해진 의미의 감옥을 견디지 못하고 언제나 요동치고 들썩거린다. 다채로운 사물들과 한바탕 신명나게 몸을 비비며 도취의 '카니발'을 만끽한다. 아마도 시인은 삶과 죽음, 주체와 객체, 인식과 대상이라는 극명한 대립의 칸막이조차 사뿐히 뛰어 넘는 '번짐의 시학'을 온몸으로 체현함으로써 구획과 분별, 질서와 나눔의 근대적 기획이 얼마나 커다란 무명(無明)의 산물인가를 보여주려 했던 모양이다. (류신/문학평론가)
정현종 鄭玄宗, (1939.12.17~ )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발레·철학 등에 심취하였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1966년에는 황동규·박이도·김화영·김주연·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였고,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하였다.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가 되었으며,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초기의 시는 관념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사물의 존재 의의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 반면, 1980년대 이후로는 구체적인 생명 현상에 대한 공감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또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시집에 《나는 별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갈증이며 샘물인》(1999)을 비롯하여 시론집 《숨과 꿈》(1982) 등이 있으며,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네루다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등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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