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은 시집이다
이기철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줄
넝쿨풀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이 긴 구절
나비 날개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은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글감상
시라기보다는 짧은 수필에 가까운 글을 대하니 내가 꼭 봄의 들판에 서있는 기분이다.
딴은 시인의 마음에는 시각과 촉각과 청각에서 시의 재료가 쏟아져 나오는 법인 것 같다.
시를 쓰고 다시 읽을 때 떠오르는 자연에 대한 감회가 또 다른 서술적 감상을 떠 올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햇살, 물, 바람이 시가되고 이 시를 읽으며 문득 봄이 정말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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